아득한 옛날 한 천삼백 년 전의 일이다. 메마른 품이 학 같은 늙은 스님 한 분이 원주지방에 찾아와 절터를 두루 고르고 있다가 관서의 거산(巨山) 치악산(雉岳山)을 향해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은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으며 원주서 치악산을 향해 육십여 리 길을 가던 대사는 그곳에서 다시 시오리 길을 더 가서 지금의 구룡골에 멎었다.
스님이 사방을 살펴보니 동쪽으로는 주봉인 비로봉이 솟아있고 다시 천지봉의 낙맥이 앞을 가로지르는 데다가 계곡의 경치 또한 아름다웠다. "절을 세울 만한 곳이군. 그러나 대웅전을 세우려면 저 연못을 메워야겠는데..."대사는 발을 옮겨 연못가로 갔다.
그때 그곳에 있던 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연못을 메우자니 모처럼 용들이 사는 것을 쫓아야겠고 난감한 일이구나..."
대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연못에 살던 용들이 들었다.
그리고는 대사를 향해, "대사님이 벌써 우리를 내쫓을 생각을 하시니 우리도 마음이 안놓여 살 수가 없소. 대사와 우리가 서로 내기를 해서 우리가 이기면 대사가 이곳에 절을 못지을 것이요, 지면 선뜻 자리를 내어드리리다" 했다.
대사가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니, "그것은 잠시 두고 보시면 압니다"하고 대답한 용들은 연못에서 날아 하늘로 치솟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우박 같은 비를 쏟아놓았다. 이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고 대사 또한 물 속에 빠져 죽는가 했으나 대사는 태연하게 앉았다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로 건너 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비를 퍼부은 용들은 이만하면 대사가 물 속의 귀신이 되었겠다 생각하고는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사는 배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홉 마리의 용들이 다 내려오자 부시시 일어난 대사는, "너희들의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 것인즉 너희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아라." 하고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 속에 넣었다.
얼마 안있어 연못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 뜨거움을 참다 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한 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서 미쳐 달아나지를 못하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
한편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로 쪼개놓으며 도망했다 하는데 지금도 구룡사에서 동해를 향한 능선은 여덟 개의 골이 치어있으며 이때 미쳐 도망하지 못한 눈먼 한 마리의 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지난 왜정 때까지 살다가 그해 여름 장마 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구룡사는 강원 원주시 소초면(所草面)의 치악산(雉岳山) 비로봉 북쪽 구룡소(九龍沼)에 있는 절로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절로 치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고승 의상이 668년(문무왕 8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던 것을 조선 중기 이후부터 '아홉 구(九)'자를 '거북 구(龜)'자로 고쳐 써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신라말·고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의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원통문
금강송은 궁궐이나 사찰을 만드는 데 쓰였는데 특히 궁궐을 짓는 목재는 소나무 외에는 쓰지 않았다
국사단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雉岳山)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이 찾아와 몰락한 이 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는 더욱 적어지고 거찰(巨刹)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런 어느날 도승 한 분이 또 찾아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이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 구(九)자 대신 거북 구(龜)자를 쓰라는 것이었다.
수령 200년된 은행나무. 1억5천만년 전 공룡시대부터 살아다해서 화석나무라고 한다.
사천왕문
석가모니 입상
대웅전은 1971년 12월 16일 유형문화 재2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것으로 정면 3간,측면 2간이며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 다
범종루
보광루는 구룡사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이 다. 입구의 추녀 밑에 '치악산구룡사(雉岳山龜龍寺)'라는 현 판이 걸려 있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맛배집으로 2층루의 마루집이다
2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인부 3인이 3개월에 걸쳐 만들었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전한다
보광루에 전시되어 있는 돌그림
통나무로 깎은 달마상
천불전
응진전
삼성각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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