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

智美 아줌마 2009. 10. 21. 04:29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로 신라 제40대 애장왕 때의 순응과 이정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가야산)에 초당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을 짓고 정사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아 해동 제일의 도량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길상탑은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를 남기신 성철스님의 사리탑

비석거리

 

 

일주문

 

이 고사목은 신라 제 40대 애장왕 3년(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어 많은 가람을 헌공하고 해인사를 창건하였기에 심은 기념 식수로 1200년을 해인사와 함께 해오다가 1945년 수령을 다해 고사하였다.

 

두번째 문인 봉황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불리는데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으로 불리는 문을 갖고 있다

 

국사당

 

해탈문(불이문)

구광루

해안도 돌기

 

범각

청화당

 

 

 

 

 대적광전

1972년 2월 12일 경남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다. 원래는 금당사에 있었는데 폐사되면서 범운이 그 말사인 용가사로 옮겼다가 1897년에 이곳으로 다시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본존 좌우에 화관을 쓴 문수·보현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다. 본존불은 높이 235cm로 목조이며, 목에는 삼도(악인이 죽어서 간다는 새로운 세계로 지옥도·아귀도·축생도를 이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넓게 파인 가슴에 옷자락을 집어넣고 양다리에 물결식 옷주름을 나타내었다. 문수·보현 양 비로자나불도 목조로 된 좌상이다.

존명을 알 수 없는 4구의 보살상, 2구의 지장보살상이 삼존상 좌우로 봉안되어 있으며, 대적광전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비로탑은  9세기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윗층 기단에 아홉개의 작은 불상이 들어있다고 한다

대비로전

응진전

명부전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판전

 

법보전(북쪽 건물)

수다라전(남쪽 건물)

 

 

 

 

 

 단풍이 들기 시작하니 성급한 나무는 벌써 색동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해인사 아래로 내려가다가 만남 두분, 젊은 보살의 손을 잡고 가시는 노스님께 시선이 멈춰 한 컷 담아봤다. 세월의 무상함이 왠지 평안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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