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대장간 마을에서 바라 본 아차산
아차산(峨嵯山)은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산이다. 1973년 5월 25일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287m이다. 예전에는 남쪽을 향해 불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이라고도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아끼산·아키산·에께산·엑끼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경기지(京畿誌)》 '양주조'에 보면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서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그밖에 산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조선 명종 때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그가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이 죽어버렸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룬다. 온달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오는데,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짜리 공기돌바위와 온달샘 등이 있고 아차산성(사적 234)에서 온달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용마산(龍馬山)은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과 중곡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48m이고 장군봉이라고도 한다. 아차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아차산과 함께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룬다. 예전에는 아차산을 포함해 남행산이라고도 불렀다. 광진구의 동북 경계를 이루며, 산지를 형성한다. 예로부터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해 만든 소규모 요새지인 보루 유적이 있다.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가 아차산과 용마봉 일대에 아차산공원·용마공원\·용마돌산공원 등 도시자연공원을 조성하였다.
산에는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사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걱정하던 부모가 아기를 죽여버렸으며 그뒤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다른 곳으로 날아간 데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용마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마산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망우산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다.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으며,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5.2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 있다
'나 홀로 떠나는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요산에 오르다. (0) | 2008.11.12 |
---|---|
안산(무악산) 산행 후 봉원사 탐방 (0) | 2008.11.09 |
청계산 산행 후 예술의 전당 (0) | 2008.11.02 |
기억 속에 있던 40년 세월 (0) | 2008.10.29 |
예전이나 지금이나 창경궁은 (0) | 2008.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