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완도에서 2시간, 지도에도 없는 섬 어서도

智美 아줌마 2014. 4. 12. 17:59

▲ 여서도 표지석표지석에는 마을 분들의 명단이 들어있다.

ⓒ 이재언

대륙의 끝 그 너머에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위에는 섬이 있다. 한반도의 남서쪽 끝자락, '섬의 바다' 다도해에서도 신안군(유인도 73개, 무인도 754개) 다음으로 섬이 많은 곳. 바로 완도(莞島)다.

265개 섬들 중 55개 섬에는 사람이 살고 나머지는 인적이 없는 무인도다. 완도는 전에는 뱃길을 따라 가야 했는데 이제 대교 하나만 건너면 쉽게 육지에서 닿을 수 있다. 완도읍을 지나 청해진에 닿으면 해상왕 장보고의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의 유적지 보길도와 아시아 최초로 슬로우 시티로 지정된 청산도까지 완도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특히 완도 선착장에서 배로 3시간 정도 거리인 완도 최남단의 섬 여서도는 하루에 배가 한 번밖에 닿지 않는 자연의 풍광을 그대로 지닌 섬이다. 긴 세월 거친 바닷바람에 맞서기 위해 담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까지 닿는 이곳은 대자연 속에서 이어온 인간의 끈질긴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물이 부족한 보통 섬과 달리 이곳 여서도에는 7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이 아직도 파랗게 솟아나고 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섬 밖에서 들여오는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섬에서 나는 물맛이 워낙 좋아 집에서 직접 누룩을 띄워 진한 농주를 마시기를 즐긴다. 올해 여서도에 하나밖에 없던 초등학교 분교가 문을 닫았다. 이 섬의 유일한 학생이었던 주훈이가 중학생이 돼 완도 본섬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여서(麗瑞)'란 이름은 '아름답고 상서롭다'는 뜻이다. 전체 인구 100명도 안 되는 완도의 외딴섬이다. 완도에서 뱃길로 꼬박 2시간 반 이상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외딴섬 여서도. 완도항에서 하루 한 번 출발하는 여객선 섬사랑 7호가 이 외딴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완도에서 2시간, 하루 한 번 다니는 배

오후 2시에 완도항을 떠난 섬사랑 7호는 소모도-대모도-장도-청산도-여서도를 향한다. 이 여객선은 여서도에서 일박을 한 후에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청산도 장도 대모도 소모도를 거처 완도항에 입항 한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다시 여서도를 향하여 뱃고동을 울린다. 세계가 지구촌 시대이며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어간 지 오래이지만 여서도는 한 번 들어가면 반드시 일박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나와야 한다.

완도항을 떠난 여객선이 큰 섬 청산도까지는 별 일 없이 잘도 간다. 그러나 청산도를 지나면서부터 먼 섬 여서도까지의 물길은 뱃사람들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바다를 상대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 '여자 속마음과 바다 잔잔한 것 믿지 말라'고 했듯이 바다는 항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그렇다 해도 요즘엔 배가 크고 속도도 빨라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추억이 여서도로의 여행을 풍성하게 해 준다. 여서도는 먼 바다에 속하는 섬이라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날엔 결항되기 일쑤. 특히 겨울철에는 그렇다.

지도에도 없는 섬, 여서도이다. 면적 2.51㎢에 해안선길이 10㎞이다. 60여 가구 7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완도에서 남동쪽 41km 거리에 있으며 제주도와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 외딴섬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으나 1945년 이후에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에서 여서도로 불리게 됐다. 1950년대 최대 240여 가구에 1200명이나 살던 마을이었다. 1968년도만 해도 여서초등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마을을 돌아보니 여서도는 다른 도서와는 특이한 점이 많아 후일 집중적인 인류학적 조사를 해볼 만하다.



▲ 물량장과 마을저녁에 여서도 해변에서

ⓒ 이재언

여서도 주민들이 이렇게 먼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 덕분이다.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는 이 섬의 생명과 같은 선착장은 이제 현대 시설인 방파제로 변해 바다 바깥쪽으로 나와 있고 외해에는 콘크리트 삼발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양쪽 긴 방파제 끝에서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반긴다. 섬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며 동서남북 각각의 해안에 작은 만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 해안이며 곳곳에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있다. 북쪽 해안에 형성된 만의 연안 일대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산재해 있어 특징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선착장이 있는 남쪽 해안이 전부다. 선착장에서 한 눈에 들어온다. 흔히 볼 수 있는 횟집이나 번듯한 건물은 발견할 수 없고 자그마한 민박 간판이 전부다. 선착장에는 넓이에 비해 배들이 별로 없다. 예전의 포구가 그대로 있다. 규모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포구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해 높은 돌담에 둘러싸여 지붕들만 보인다. 해안이 좁은 탓에 집들은 산자락에서 산 중턱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담장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온통 돌담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제주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높이도 3m 이상은 됨직하다. 거기에다 골목길도 자전거 하나 다닐 수 없는 계단에다 좁은 편이다.

지붕 높이까지 올라간 돌담의 비밀



▲ 높은 돌담위에 있는 창문겨울에 바람을 막아주는 높은 돌담

ⓒ 이재언

모든 집은 앞집과 뒷집 모두 돌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성벽처럼 높고 튼튼한 돌담길을 따라가면 몹시 구불구불하며 미로처럼 얽혀있다. 도로도 좁은 탓에 경운기나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무거운 짐들은 지게로 힘들게 지고 날라야 한다. 집의 담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돌담에는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은 섬에서 왜 이토록 높은 돌담이 필요했을까? 여름에는 태풍과 파도를 막아 주고, 겨울에는 북풍이라는 자연의 재해를 막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섬을 다니지만 이토록 원형이 남은 돌담은 내가 다녀본 섬 가운데 최고라 하겠다.

마을 뒤로 갈수록 길은 없어지고 산길이 이어지는데 집들이 거의 폐가다. 마치 성벽을 연상시킨다. 거기에다 층을 이루고 있었다. 밭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고 작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층층이다. 그 옆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글쎄, 이것을 '다랭이 밭'이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다. 왼쪽은 계곡인데 계절 탓인지 모르겠지만 흐르는 물은 없다. 그러고 보니 마을은 계곡 사이로 형성되어 있다.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밭이 나타난다. 밭에서 보는 마을 풍경이 조금은 억척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밭도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닌 조그마한 것들의 연속이다. 밭에는 흑염소들이 제법 보인다. 대부분이 묶여 있다. 벌어먹고 살 논도 없고, 마을 산비탈을 깎아 마을이 형성되어 리어카도 들어가기 힘든 착박한 땅이다. 바다 양식도 먼 바다에 홀로 떠 있기에 바람과 파도 때문에 불가능 해 오로지 고기잡이에 의존해 사는 곳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섬,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도우며 가족처럼 산다.

원래 이곳은 소 방목으로 유명한 곳이다.산을 타는 건강한 소들도 만날 수 있다. 이 소들은 외지에서 3월초에 사 들여와 봄철에 산에서 방목한다. 겨울이 되면 훈련된 소가 되어 민가로 돌아온다. 20여 가구 주민이 소를 키우고 있는데 운동을 많이 한 여서도 소는 근육이 발달해 육회용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여서도는 아직까지도 때묻지 않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이다. 특히 30~40m 깊이의 바닷속이 훤히 보일만큼 맑아서 "여서도로 시집가던 새색시의 앞섶이 풀어지며 옷고름이 바닷물에 빠져 황급히 들어 보았더니 옥색으로 물들어 있더라"라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깨끗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와 제일 가까운 곳이라 일 년 중 200일 정도는 시야로 제주도를 볼 수 있다. 이 곳의 어종과 동식물은 보호할 가치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특산물인 자리돔(생이리)이 완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잡히고 있다.

옛날부터 제주 풍선들은 이 곳을 지난 때마다 대지를 섬 앞바다에 던져 무사통과를 빌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자녀를 유학 보내고 육지에 몇 백 평씩 소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자유당 시대의 국회의원 김선태씨와 김수근(조대법대학장) 등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한때 동력선이 40여 척 있고 고졸 이상 유학생이 19명이나 있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해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있기 마련이다.



▲ 여서도 돌담길동네가 온통 돌담길이다.

ⓒ 이재언

여서도에 제주출신 여인이 많은 까닭

여서도는 청산도와 제주 추자도간 거리의 꼭 중간에 있다. 지금 이 섬에는 제주도 출신 아낙네들이 몇 명 있다. 여서도와 제주도가 가깝다 보니 이곳으로 물질을 왔다가 여서도 총각과 눈이 맞은 것이다. 제주도 해녀들은 한번 물질을 오면 계약 기간 때문에 오랜 기간 머물러야 했다. 또 돌아가고 싶어도 여객선도 없고 지금처럼 빨리 달리는 배가 아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해의 여서도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섬에 묶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젊은 처녀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갇혀 있다 보면 자연스레 섬 총각과 가까워지는 범. 섬을 나설 때 쯤에는 어느덧 애 엄마가 되었다는 얘기다. 속된 표현으로 파도가 거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섬 남자들과 '눈이 맞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 사이에선 '여서도에 가면 아기를 배어야 나온다'는 말이 전해진다.

너무 가난한 섬이기에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세말을 못 먹는 곳'이 청산도라면, 여서도는 '평생을 살아도 쌀 한 가마니를 못 먹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먹을거리가 궁하고 가난한 섬이다.

이곳에 30~40대는 10여명 안팎이다. 나머지는 모두 고령의 노인들뿐이다. 생활보호대상자가 17명, 독거노인이 20여 명으로 섬을 떠나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많아 빈집도 많다. 현재 이곳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민박 두 곳과 가게 두 곳이 문을 열고 있다.

마을회관 방향으로 가면 그 앞에 새로운 마을표지석이 있다. '신비의 섬 여서도'라고. 표지석 바로 옆에는 마을주민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남편 이름과 부인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표석이 있는데 마을 연혁이 새겨진 표지석이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 같은데 이것에 의하면 2008년에 여서도에는 9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 새겨진 주민이름들도 모두 90명이다.

이 뒤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그 옆으로는 창고인 듯 보이는데 창고 한 쪽에 부녀회관이 입주해있다. 이 앞에는 팔각정 쉼터가 있다.

또 다른 골목 입구에 보건진료소가 있으며 그 모퉁이에 이정표가 있다. 민박 간판이 있는 돌담 옆에 마을의 시설물을 알리는 표지판인데 '등산로입구'다. 6개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서항까지 5.11km라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바퀴 도는 형식으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이 섬의 가장 높은 곳인 여호산 정상까지는 거리가 2.36km란다. 여호산의 해발은 무려 352m다. 여서도의 산은 산림이 상당히 우거져있어 밀림을 연상하게 하고 사실 육지산과는 달리 나무가 우거져있어 산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다.



▲ 여서도와 등대여서도의 산위의 무인등대

ⓒ 이재언

마을안쪽에는 섬마을 교회가 있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은 곳에 여서초등학교 분교인 청산초등학교가 있다. 섬에서 유일하게 문화를 접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시멘트 계단으로 된 입구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여서도31번길 22-8'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산초등학교 여서분교장'이 붙어있다.

문이 없는 교문에서는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로 운동장. 잡초들로 인해 조금은 폐허가 된 듯한 느낌. 그리고 그 뒤로 높은 곳에 학교 건물이 달랑 하나 있다. 학생 수는 1명이다. 그것도 6학년. 6학년짜리 학생이 졸업하면 바다가 유일한 놀이터인 섬의 아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 기숙사 등 부속건물은 학교 바로 바깥에 위치해 있다. 학교 옆에 여서도 내연 발전소를 뒤로 하고 높지 않는 산 정상에 올라가니 여서도 앞 바다를 비추는 무인 등대는 태양광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등대를 둘러싼 철조망 울타리가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아랫마을과 물량장, 항구의 배들과 건너편 산의 중턱까지 밭이 보인다. 지금은 거의 휴경지이지만 비탈 밭은 남해의 다랭의 논 처럼 섬살이의 고단함을 증거 해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여서도는 언제 생겨났을까

'완도군지'에 따르면 고려 목종 10년(1007년) 탐라(제주) 근해에 7일간 대지진이 지속된 뒤 바닷속에서 큰 산(섬)이 솟았다고 한다. 고려의 '려'자와 상서롭다는 '서'를 따 '여서'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여서도에서 발견된 패총이 7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이 출토되었을 정도로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는 길다. 여서도는 외딴섬이라서 왜적의 침입에 시달렸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여서도에도 그전에는 왜구들의 침범이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90년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이다. 진주 강씨가 여서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다. 주민들의 생계수단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 쌀, 보리, 콩, 참깨 등이 소량 생산된다. 근해에서는 도미, 숭어, 도다리 등이 잡히며, 자연산 돌미역, 해삼, 전복 등이 채취된다. 여서도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것은 미역, 소라, 전복, 해삼 등. 특히 여서도의 자연산 돌김, 김, 톳, 미역, 파래는 육지 가까운 데서 양식한 것과는 색깔과 맛이 다르다. 그리고 여서도의 자연산 해초는 최상급. 그 중에서도 봄에 처음 따는 미역인 여서도의 초각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서도는 정확히 완도와 제주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직선거리로 제주까지 40여km 이다. 완도 41km,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km, 바다의 한 가운데 있다 보니 풍선(風船)들이 각종 화물들을 싣고 가다가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전라남도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가다가 바람을 기다렸다. 여서도는 서울에서 목포를 가는데 KTX가 통과하는 광주의 송정리역 정도 비교할 수 있다. 지금은 배들이 크고 빠른 동력선이기 때문에 먼 바다까지 진출하며 자녀 교육과 편리함 때문에 항구 도시에 생활권을 둔다.

완도가 여서도 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1968년 완도대교가 생기고 부터이다. 전에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도시와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60~70년대 이곳 사람들은 멀리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에서 잡은 고기를 팔고 생필품을 사들고 왔다.

그 당시 고기잡이 동력선만 50여척이 철 따라 고기를 많이 잡았다. 냉동 시설이 미비한 그 때에 잡아온 삼치나 갈치 고등어를 소금으로 '염장질' 해서 여수나 녹동으로 팔러 다녔다. 섬으로 돌아오면서 지붕 이을 볏짚과 식량 등 겨울 날 곡식을 싣고 왔다. 식구가 많은 그 시절 보리가 나올 때까지는 온 식구가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갈치잡이 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이 조그만 섬에 1000여명의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생존 경쟁이 치열하였다. 바다 일 못지 않게 농사도 큰 일중 하나였다.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밭으로 달려 나가고, 가축을 기르며, 그물 일을 하고,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나무와 숲이 우거진 관계로 약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약초를 캐다 약초수집상들에게 넘기도 하였다.



▲ 낚시에 몰두한 어느 주민낚시천국으로 유명한 섬 여서도

ⓒ 이재언

지도엔 없지만 낚시꾼들은 잘 아는 섬

섬은 낚시꾼들에겐 익히 알려진 명소다. 낚시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여서도를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뱅어돔, 감성돔, 돌돔, 해삼, 전복 등 어족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섬이라 이곳을 찾은 낚시꾼들만이 늦은 밤까지 밤낚시로 활기를 띤다고 한다. 봄엔 볼락, 여름엔 돌돔, 가을엔 참돔, 겨울엔 감성돔이 잡힌다. 1960년대엔 어업으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지금은 예년만 못하다.

과거의 어장은 6월부터 9월까지 송진과 솔로 만든 햇불로 멸치잡이를 하고 4월부터 9월까지는 미영(목화)을 타서 물레로 실을 잦아서 낚시좋을 만들어(50-60년전) 고등어 잡이를 하였다. 건착망 어선이 번성하면서 과거식 방식은 없어졌고 현재 고등어 잡이는 안강망 어선이 주로 한다. 7월부터 10월까지는 낚시로 갈치 잡이를 하였다. 당시 멸치잡이를 하던 l1명이 승선하는 이앵이 배가 있었고 1930년경부터 5장대 배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12~15명 선원이 타며 10개의 창고가 있다하여 열간 답이라고도 불렀다. 이 배는 10~15년 전에 없어졌다.

1장대는 5자에 해당한다. 배의 멸치장이 어부들이 밤에 뱃전을 치면서 소리를 내면, 멸치들이 튀어 오르면서 햇불을 쫓아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선주는 선원을 모으기 위하여 선원에게 선금으로 보리 1가마를 주었다. 일단 구성된 선원들은 6월부터 9월까지 모두 행동을 같이 했다. 잡은 멸치는 전부 16짓으로 나누었다(선원 12명에 12젓이고, 뱃짓이 4짓이다.). 나머지는 술값으로 썼다. 멸치의 양으로 보면 1짓이 한통체리에 해당한다. 한 배가 잡아오는 양이 15통체리로 240통이 된다(한통체리는 16통).

하지만 이곳은 20년 전부터 멸치잡이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안강망들이 제주해협에서 멸치 떼를 미리 잡아버리기 때문에 이곳까지 멸치가 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최근에 한우를 방목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거의 모든 도서에 전기가 들어가서 주민들의 생활방식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정용 전기제품의 사용이 증가하였고 전기는 연료로도 사용하고 있다. 전기와 함께 연탄이 연로로 이용되므로 산림녹화에 도움이 된다는 관계당국의 평가는 외부에서 도입되는 연료(전기와 연탄)의 의존도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여서도는 매립으로 이루어진 물양장이 제법 넓고 큰 편이다. 운동장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넓다. 그러나 여느 항구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얀 등대가 있는 방파제 쪽의 산을 깎아 매립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6~7년에 걸쳐 방파제 공사가 끝이 났다. 오래 전에 매립공사를 하는데 660억 원대 공사가 1천억 원대 공사가 되어서야 끝이 났단다. 공사 중에 태풍을 두 번이나 맞아 보수한다고.

이곳 주민들은 청정 해역에 있는 아름다운 섬에 환경훼손이 심각하다고 하소연 하였다. 환경오염은 물론이고 자연경관 훼손, 방파제 공사로 조류소통을 막아 마을 앞 바닷물이 정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마을주민들은 방파제에 원활한 조류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과 마을 오폐수처리장 시설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이곳 여서리에는 전답이나 마찬가지인 황금 바다를 지키기 위하여 주민들의 배가 매일 갯바위 주변을 순찰한다. 외지 선박이 불법조업(뻥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자체적으로 돈을 걷어 고향의 바다와 삶의 터전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 정정석 이장이 말을 들어보자.

"타지 배들이 조업을 하거나 불법조업을 하고나면 감성돔이나 농어, 숭어 등 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해경과 행정에 진정도 했지만 현장에서 잡지 못하면 현행법상 법적 제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단속이 어렵다고만 합니다. 더구나 불법어장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눈을 뜨고 보면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여서도 주민의 낡은 배로는 타지 배들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여서도 선착장에서삼치를 갓 잡아온 어부

ⓒ 이재언

여서리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조업 어선들에게 0.5마일(800m) 안으로 들어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특히, 불법어업을 엄격히 단속할 강력한 법 규제를 마련해서라도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여서도 인근 바다에서 불법 어업행위가 계속된다면 마을 사람들은 몇 년 후쯤이면 고향 섬을 등지고 모두 떠나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양장 가장자리에 마을표지석이 단순하게 세워져 있다. '여서도'. 그 뒤로 '여호리조트'라는 표지석이 있고 거기에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는데 민박(2층)겸 슈퍼(1층)다. 그 뒤로 언덕인데 그 주위에는 예전에 군 시설로 썼을 낡은 콘크리트시설물들이 나란히 있다. 초소와 막사로 사용되었을 건물들이다. 그 앞에는 '여서도치안센터' 파출소가 있다.

여서도를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여서도는 너무나 외로운 섬이었다. 이러한 섬의 전통적인 모습이 낚시꾼들과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낚시와 다이버와 산과 바다와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1년 중 몇개월 살기에 딱 좋다.

여서도는 이제 마지막 남은 청정지역이다. 바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계곡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좋다. 이곳에서 매년 휴가를 보내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의 먼 섬인 탓에 우리네 60년대 사람들의 인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여서도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 늘 그리움과 고독의 섬으로 남아있다.

여서도에 가려면?

▣ 여서도 개요
여서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55′. 북위 33° 59′에 위치하며 면적 2.5㎢, 해안선 길이 10㎞, 최고점은 362m 큰산이다. 인구는 100명(2001년)이다.

지명유래
여서도라는 이름은 1945년 이후에 붙여졌다.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다.

? 여서도 가는 길
완도항에서 섬사랑7호가 하루 한 번(2시30분 출항)씩 출발하는데, 이 배는 소모도와 대모도, 장도 청산도을 거치는 완행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오전 7시 30분 완도항으로 출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