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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황석산성

智美 아줌마 2016. 8. 6. 14:01

경남 함양군 황석산성

황석산성 서북문 쪽에서 황석산성 정상부를 올려다 본 모습. 왼쪽이 성 안쪽이고, 오른쪽은 성 밖이 된다. (사진제공=함양군청)

 

어느 기자가 쓴 황석산성 전투

한겨레신문 2015년 6월 3일자에 실린 곽병찬 대기자의 글 ‘황석산성 백성의 전투’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게 되는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이끄는 좋은 글이다. 글의 서두는 다음과 같은 서정적인 묘사로 시작된다.

'정상 부근엔 산철쭉이 여전히 투명한 연분홍 꽃 무더기를 이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다 싶었는데, 후두둑 꽃이 떨어졌다. 발밑엔 이미 떨어진 것들이 꽃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생화의 아름다움에 혹해 낙화의 슬픔을 잊고 있었다. 418년 전 권력자들이 버린 이 땅을 지키려다 그곳에서 스러진 꽃 같은 이들의 순절을 잊고 살아온 것처럼.'

 

글은 이어서 황석산성에서 진행된 전투의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며, 비장한 그날의 분위기를 짚어주었다. 그리고 당시의 역사기록이 자세히 전해주지 않아 감추어진 진실을 합리적인 추정과 상상력으로 복원해준다.

'지금까지 우리 사서는 왜군 2만 7천여 명이 단 하루 만에 (황석)산성을 함락하고, 조선 병사 500여 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긍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산성에 한 번 올라가 보면 안다. 험준한 능선을 잇는 산성은 길이만 2.75 킬로미터에 이른다. 500명이 늘어선다 해도 6미터에 한 명 꼴이다. 그 숫자로는 방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중과부적의 숫자를 채운 것은, 공식 역사가 지워버린 백성들이었다. 군무장 유(명좌) 좌수의 신도비 연보를 보면, 거창, 함양, 안의에서만 각 1,000명 이상씩 올라와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 산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이들이었다.'

 

조일 6년전쟁의 마무리를 이끈 황석산성 전투 우리가 흔히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되어 1597년 정유년에 종료된 동아시아 국제전을 말한다. 이 전쟁의 원인은 익히 알려진 대로 일본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조선은 초기 연전연패한다. 개전 후 20여 일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었고, 조정은 사실상 흩어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전 후 질풍처럼 조선을 유린하던 왜군은 그러나 곧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을 만난다.

첫째는, 병참선 확보가 불가능해진 난관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철두철미하게 바다를 지켜냄으로써, 북진하는 왜군들에게 공급되어야 할 군량이 제 때 조달되지 못했다. 예비적으로 고려되었던 현지조달책(곡창인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노략질해서 확보하는 방안)은 이순신이나 권율, 김시민 장군 등이 이룬 값진 승리로 인해서 전혀 효과를 낼 수 없었다.

 

둘째로는, 의병들의 대대적인 국난극복 참여였다. 이는 사실 조선 건국의 기반이 되기도 했던 유학 이데올로기의 이름다운 발현이었는데, 왕과 관료들의 무능 무책임과 대조적으로 유능한 선비들이 대거 의병을 모아 국난극복에 나섰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기후조건이었다. 기후가 따뜻한 일본에 비해 한반도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한 조건이 되었다. 왜군들의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끝으로,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병이 들어서, 더 이상 이 무모한 전쟁을 확대시킬 동력이 사라진 점도 있었다.

우전마을에서 피바위 하단을 지나 황석산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에 설치된 안전로프. 황석산성 접근로는 모두 이렇게 가파르다.

 

황석산성이 위치한 함양과 황석산

사적 322호 황석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함양지역은 백두대간 남덕유산 구간의 우하방이다. 백두대간이 남덕유산-깃대봉-백운산-삼봉산 등으로 이어지며 남진하다가 남동쪽으로 약간 방향을 트는데, 그 안쪽이 바로 함양이다. 함양은 서쪽과 남쪽을 백두대간으로 울타리처럼 두르고 있다.

다시, 남덕유산 자락에서 동남 방향으로 백두대간과 거의 대칭을 이루며 이어지는 산들이 있다. 기백산, 금원산, 거망산, 황석산 등 진양기맥인데, 이 산들 역시 1000m를 넘는 높이여서 서남쪽 대간에 밀리지 않는다.

 

황석산 정상은 공룡의 등줄기처럼 암봉과 암릉으로 이어져 있다. 6.25때 ‘빨치산 여장군’이라 불렸던 정순덕이 활약했던 곳이 바로 거망산이었다. 거망산에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광활한 억새밭이 장관이고, 금원산과 기백산 사이에는 그 유명한 용추계곡이 있다.

함양에는 전부터 유서 깊은 누정들이 많이 있다. 황석산 주변 골짜기만 해도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 등이 있다. 황석산성 왼쪽으로 백두대간을 넘어 전남 장수군으로 이어가는 고개가 있다. 바로 육십령이다. 높이 734m. ‘육십현’ 또는 ‘육복치’라고도 불렀다. 고개가 가파르고 험해서 이곳에는 도적떼가 많았고, 그래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최소한 인원이 60명은 되어야 해서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영남과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로 조령(643m)·죽령(689m)·팔량치(513m) 등이 있었는데, 여기에 육십령도 당당히 포함되었다.

 

황석산성 주 출입로로 추정되는 남문지. 복원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성벽의 윤곽을 이루고는 있으나 아직도 문루가 복원되지 않았고, 여장의 형식도 정형이 아닌 변형된 모양이다.

 

정유재란과 황석산성 전투

조일 6년전쟁의 큰 흐름은, 개전 초기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와, 이어지는 조선의 반격, 그리고 수년간 진행된 평화교섭이라는 지루한 소강상태와, 마지막 정유년의 재침과 격퇴로 요약될 수 있다. 황석산성 전투는 이 마지막 단계를 주도한 아주 중요한 전투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재침해 온 왜군은 모두 12~15만 정도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뉘어 임진왜란 발발 후 1597년까지 발을 들이지 못했던 호남지역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일단 호남의 중심 전주(全州)였다.

 

왜의 좌군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총사령으로 하는 6만여 명의 병력이었다. 남해안을 통해 하동에 상륙하여 구례를 거쳐서 남원성 방향으로 공격로를 삼았다. 왜의 우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을 주장으로 삼고 7~8만여 명의 병력으로 양산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밀양, 창녕을 거쳐서 영남과 호남의 경계인 함양과 안의 쪽으로 진출하였다. 전주로 가기 위한 경로로 육십령을 택했고, 그 길목을 뒷덜미에서 노리는 형세인 황석산성을 공격해왔다. 사실 왜 우군은 황석산성을 공격하기 전 창녕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대치하였는데, 지세의 험함과 임진란 때 곽재우 장군이 얻은 명성에 눌려서 우회하는 방법을 택했다.

 

황석산성 동문에서 서북문에 이르는 중심 성벽은 황석산의 종주선에 최소한의 인공적 치석을 보탠 거의 자연상태에 가까운 성벽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이에 대한 유의나 대비가 없지 않았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조정은 전국 요지에 산성을 대거 증개축하도록 했다. 체찰사 이원익이 주로 이 업무를 담당했는데, 안음, 거창, 함양 등의 군민들을 모아서 황석산성을 고쳐 쌓았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황석산성에서의 전투가 임박해지자, 조정은 주변 7개 군현의 백성들 7000여 명에게 황석산성에 들어가서 입보농성 하도록 명했다.

황석산성의 방어의 책임자는 안음현감 곽준(郭遵)이었다. 전 함양군수 대소헌 조종도(趙宗道)와, 거창좌수 유명개(劉明盖) 등이 합류하여 지휘부를 형성하였다.

 

무관인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조방장(助防將)으로 참여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제일 먼저 성문을 열고 왜군 복장을 한 채 도주해버리고 말았다. 패전의 최고 책임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 이로 인한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대 금수저 신분으로 권력의 비호를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황석산성 전투는 1597년 8월 14일(음력)부터 18일까지 5일간 진행되었다. 왜군은 이 전투로 무려 4만6천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황석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잔혹한 보복과 학살이 자행된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왜군들은 충청도 직산까지만 겨우 진출했다가 끝내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안의 쪽 탁현마을이나 장자벌에서 황석산성으로 올라오는 연결통로인 동북문 문지.

황석산성 돌아보기

황석산성으로 들어가는 경로는 대략 5곳이 있다. 그중 필자가 답사한 코스는 우전마을에서 피바위를 거쳐 남문지로 들어가는 코스였다. 봉전마을에서 우전마을로 포장된 산길로 올라가다보면 사방댐이 보인다. 차량 5대 정도가 주차할 공간이 있다. 거기서 오르막으로 조금 더 오르면 길 오른쪽으로 리본이 많이 걸린 곳에 통로가 보인다. 그 통로를 따라 오르면 크게 가파르지 않은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이윽고 왼쪽으로 까마득한 절벽이 나타나는데, 황석산성이 함락되던 그날에 성안에 있던 부녀자들이 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투신한 피바위라는 곳이다.

황석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가 부착된 바위. 높이가 1190m이다.

 

피바위 하단을 지나 가파른 경사길을 한참 오르니 드디어 남문지에 닿는다. 양쪽으로 두 길 정도 높이로 성문기단이 세워졌고, 그 양쪽 뒤편으로 성벽 흐름이 이어진다. 성문에 문루는 복원되지 아니하였으나 문루가 있었던 흔적은 보인다. 문지와 이어지는 성벽은 체성과 여장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 같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복원하면서 약식으로 흉내만 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양쪽 성벽이 벌어지는 모양인지라 오른쪽 성벽을 따라 산자락을 타고 오르기로 한다.

곧 복원된 성벽이 다시 무너진 곳이 나타난다. 무너진 성벽의 흐름은 오른쪽이지만, 등산로는 계속 봉우리로 직상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계속 나가면 무너진 성벽 끝으로 동문지가 나타날 것이지만, 그러나 동문지로는 지금 정상적인 등산로로 연결되지 않는다.

 

황석산성 남문지와 북동문지, 그리고 거북바위가 있는 서문지 쪽으로 각각 길이 갈라지는 성내 중앙부.

 

남문지에서 앞에 보이는 봉우리로 곧바로 오르면 거기가 바로 중봉으로, 황석산의 장축능선이자 황석산성의 동벽이 된다. 동벽을 따라 거대한 중봉을 넘으면 이제 동북문지가 나오는

 

데, 이 구간도 현재 복원이 잘 되어 있다. 동북문 밖으로는 황암사에서 출발하는 등산로와 유동마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연결된다.

동북문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흐름은 이제 황석산의 정상부를 통과한다. 역시 자연 암릉에다 성벽을 덧댄 구조이고, 굳이 성벽을 세우지 않은 곳이 많다. 성벽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거북방위와 서문지를 만나게 된다.

서문에서 성벽은 절벽 위로 이어지는 긴 용도와 피바위 상단을 연결하는 흐름으로 남문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동문구간 만큼이나 답사가 어렵다. 따라서 이 구간의 답사는 성 안 골짜기나 우물터 건물지 등이 있었던 저지대를 지나는 성내 등산로를 따르는 것이 좋다. 성내 등산로는 남문에서 성내 평지를 지나 서문지로, 또는 동북문지나 정상으로 이어진다.

 

황석산성 서문지에서 왼쪽으로 황석산 정상부를 바라보게 되면, 그 중간에 거북이 모양의 거북바위가 보인다. (사진제공=함양군청)

Information - 교통

함양은 한반도의 남부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다양한 도로망이 통과한다. 우선 서울, 인천 등 수도권에서는 먼저 경부고속도로를 탔다가 천안을 지나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로 바꾸어 타고 함양으로 오는 것이 유리하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이어서 함양으로 올 수도 있다. 부산 쪽에서는 남해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이어 오는 것이 빠르고, 대구나 광주 쪽에서는 88올림픽도로를 이어서 오는 것이 적절하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올 때는 서상IC나 지곡IC로 빠져 나오는 것이 유리하다. 함양군내 버스 운행사항이나 시외버스 운행사항은 함양지리산고속(주)에 문의하면 된다. 전화번호 055-963-3745~6.

황석산성 함락이 목전에 이르자 성안에 있던 많은 부녀자들이 이 까마득한 절벽을 뛰어내려 자결함으로써 절조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붉은 피바다를 이루었다는 피바위 절벽.

이수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