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창원 해양 솔라 파크(전시동)

智美 아줌마 2015. 1. 13. 16:00

문신 미술관에서 마지막 코스인 해양 공원으로 가는데 원래 일정대로 하면 해양 공원에서 1시간 정도 시간을 주기에 실상 그 시간으로는 입구 쪽에 있는 해양 생물 테마 파크 주변밖에 관람할 수 없다. 그래서 자유롭게 둘러보고  대중교통을 타고 가겠다고 하고 시티투어 버스는 운행 종료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해양 공원에 가서 솔라 파크와 우도를 둘러보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은 앙꼬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으므로 다소 불편하고 힘들어도 그렇게 결정하고  입구 쪽 해양 생물 파크는 실내에 있기에 날이 어두워져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어서 먼저 솔라 파크와 우도를 가기로 했다.

 

음지교, 다리 건너오기 전, 앞에 산 있는 곳이 육지인 명동이라는 지역인데 다리를 놓아 음지도와 연결하여 음지도가 육지화된 곳으로 이곳에 해양 공원을 만들고 2013년 솔라 파크를 개장하였고 음지도 뒤에 있는 우도와 보도교를 연결하여 대단위 관광지가 되었다.

 

해양생물 테마파크 뒤로 솔라 파크 타워가 보인다. 탑 위에 동그란 부분이 솔라 타워 전망대이다.

 

주차 타워 옥상 주차장에서 시티 투어 버스를 내리고 먼저 솔라 파크로 올라간다.

누구나 편하게 다닐 수 있게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 음지도 섬을 한 바퀴 돌며 산책하기 좋다.

디즈니 만화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어 공주 가족들이 여기 다 모여있네. Under the sea ♬ ~

 

건너편에 국가 산업 단지 STX 조선해양이 있는데 STX 조선 해양은 선박 기자재의 설계·제조에서부터 상선, 크루즈, 특수선 등 선박 건조와 연계된 조선 사업은 물론 연관 산업인 해양 자원의 개발과 운송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솔루션을 제공하는 글로벌 조선 해양 기업이 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올망졸망 작은 섬이 참 많다. 다 무인도인가?

 

 

해양 솔라 타워

해양 솔라 파크 전시동을  먼저 관람하고 타워로 올라간다.

 

그린 에너지 전시관

 

창원의 설화가 전시장에 여러 편이 있다. 그 중에 시락 암굴과 정렬부인 이야기를 올려 본다.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낙동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해안의 절벽 밑에 암굴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시락 암굴이다.
평소 7,8명의 인원이 수월하게 들어앉을 수 있는 이 암굴은 만조(滿)때가 되면 바닷물이 입구에까지 차오르지만 그 이상은 더 물이 들지 않으며 옛날부터 난리가 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더러 이곳에 와서 피난을 하였다고 전해 온다.

옛날 임진왜란 때 어느 젊은 부부가 난을 피해 이 암굴에 와서 숨어 지냈다. 때는 마침, 해상의 도처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고가 한창 드높던 무렵이었다. 도망치던 왜적의 배 한 척이 때마침 이 근방을 지나다가 문득 암굴 속의 인기척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번에 이 암굴을 수색하여 젊은 부부를 끌어낸 다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베어 죽이고 기절한 부인을 배에 싣고 달아났다.

얼마 후에 부인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자신은 적병들에 의해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물속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이미 그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번번이 욕을 보이려고 달려드는 왜병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부인은 안간힘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힘이 이 많은 짐승들을 어떻게 감당하랴. 장차 부인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날 밤 부인은 힘에 지쳐서 쓰러진 채로 그만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뱃전에서 남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 때 문득 부인의 머릿속에 한 가닥 계책이 스쳐 갔다.

‘오냐, 이 원수는 내 기어이 갚고야 말리라.’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고 나서 부인은 자기의 몸속 깊이 지니고 있던 장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앉은 자리에서 배 밑바닥을 파기 시작하였다. 왜적들은 오랫동안의 패전에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으므로 모두 깊은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부인은 다만 일심으로 손을 놀렷다. 오직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으리라는 집념 하나로 뱃바닥을 파들어 갔던 것이다.

이윽고 배 밑바닥에 쥐구멍만한 구멍이 하나 뚫렸다 부인은 계속 그 구멍을 넓혀나갔다. 부인은 천지신명께 배 밑바닥이 완전히 뚫릴 때까지 원수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칼질을 하였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일인데 시각은 이미 밤을 지나고 멀리 수평선 위에서 희미하게 먼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부인은 이 때 마지막 남은 구멍 하나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으니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구멍을 뚫는데 성공을 하였다. 그 구멍으로 줄기찬 바닷물이 펑펑 차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자 부인은 천지신명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큰 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한편 왜적들은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니 그들은 모두 아우성을 치며 우왕좌왕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되어 모두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베틀 바위와 삼형제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괴정리 마을 앞에는 해발 600m의 베틀산이 있는데 여항산을 줄기로 진북면 대티리와 금산리, 부산리 등의 삼각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베틀산의 정상에는 약 20여 평의 평평한 바위가 있으며, 이 바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베틀 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가 베틀 바위가 된 연유는 괴정 마을에서 바라보면 바위의 형상이 꼭 한 대의 베틀을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또한 예부터 전하여 오는 전설에 의하면 어떤 아낙네가 사시장철 이 베틀 바위에 앉아 베를 짰다고 한다.

아주 오랜 옛날 이 세상에 천지개벽이 일어나 베틀산 부근이 온통 바닷물에 잠기게 되었다. 바닷물은 마을을 덮고도 점점 불어나 마침내 베틀산 정상에까지 차오르게 되었다. 그때 베틀 바위에는 그 아낙네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는데 정상에까지 차오르던 바닷물이 더 이상은 불어나지 않고 베틀 바위 근처에서 찰랑거리다가 차차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바위에는 그때의 흔적으로 조개껍질이 더러 붙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베틀 바위에서 마주 건너다보이는 산이 광려산인데 해발 752m이다. 이 광려산 정상 부근에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삼형제 바위라고 부른다. 이 삼형제 바위는 건너편의 베틀 바위에서 베를 짜는 어미를 종일토록 기다렸다고 하며, 삼형제는 모두 자라서 나라의 힘이 센 장사()가 되었다는 전설을 또 가지고 있다. 옛날부터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면 이 고을의 현감이 이곳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하고 있다.

 

 

「제황산 산신령의 노여움」은 일제 강점기 일본 해군이 제황산에 러·일 전쟁 기념 승전탑을 세울 당시의 일화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제황산의 ‘지명 유래담’도 일부 수용되어 있다. 승전탑을 세우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할 때부터 묘법사의 일본인 승려의 꿈에 나타난 산신령은 진해를 지키는 혼령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러 공사 중의 사고들에서 일본인들만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이 지역 주민들의 항일 정신과 맞닿아있다.

 

 

여지도는 편찬연대, 제작자 미상의 조선시대 종합 지도책으로 보물 제1592호. 3책의 지도책으로, 1책에는 서구식 세계지도인 천하도지도, 조선전도인 아국총도,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 지도인 북경도성삼가유시오단팔묘전도, 중국지도, 의주-북경 사이의 사신로를 그린 지도, 도성도, 조선․일본․유구(오키나와)를 합한 동부아시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2책에는 팔도가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평안도-강원도-함경도의 순서로 그려져 있고, 3책에는 청나라의 광역행정단위인 16개의 성이 성경성-직예성-산서성-협서성-하남성-산동성-강남성-호광성-사천성-강서성-절강성-복건성-광동성-광서성-귀주성-운남성의 순서로 그려져 있다.

지도책의 제작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조선전도인 아국총도와 도별 지도에 1787년(정조 1년)에 신설된 함경도의 장진도호부가 표시되어 있어 최소한 그 이후에 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1789년(정조 12)에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긴 현륭원이 수원에 표시되어 있는 반면 1795년 이후에 변화된 시흥, 노성, 이원 등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아 그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창원 홍보 자료와 옛 창원의 모습들이 전시 되어있다. 어느 지역이라도 이런 풍경이 그립다.

 

 

 

 

창원의 관광 명소 소개도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