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왕 16년인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하동 정씨 정려각
조선초 학자이며 명신인 정인지(1396~1478) 선생의 5대손으로 임진란 때 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득열(1565~1592)과 그의 아들 택뢰(1587~1623), 손자 천세와 택뢰 부인 동래 정씨등 네분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건립하였다.
택뢰부인은 남편이 광해군의 어머니를 폐모하는데 항소하다 세상을 떠나자 머리를 자르고 3년상을 치른 후 죽었으며 아들 천세는 11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밤낮을 통곡하면서 지내다 열흘이 못되어 죽었다 한다.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터
서복사지는 백제시대의 사찰터로 부소산 서남 기슭 1,650㎡ 규모의 평탄한 대지에 있다. 1942년과 1980년의 발굴사업으로 중문, 탑, 금당, 회랑 등이 남북 자오선상으로 배치되어 있었음이 알려졌다. 유물로는 금동 풍탁·벽화·소조불상·와당·치미·요대 등이 출토되었다.
사자루는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로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곳으로 백제 때에는 이곳에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이름 하였다. 현판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공이 쓴 것이다.
낙화암으로 내려가는 길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삼천궁녀들은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백화정은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이곳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운 것이다
고란사로 내려가는 길
고란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백마강을 유람하는 황포돛배
영종각
고란사 벽화
삼성각
삼성각에서 올려다 본 낙화암
고란사 약수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삼 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이 물은 임금이 마시는 물이라 하여 어용수라 부르기도 했는데 임금에게 올릴 때 이곳의 물임을 알 수 있도록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고란초 잎을 띄워 올렸다 한다.
샘이 깊어 왼족에 걸려있는 긴 국자로 물을 떠먹어야하는데 물 먹기가 좀 불편하다
고란초는 충청남도 부여읍에 있는 고란사(皐蘭寺) 뒤의 절벽에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전국의 강가 절벽이나 바닷가 숲 속에서 자란다. 한국·일본·타이완·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제외한 식물체 전체를 약재로 쓰는데, 종기와 악창에 효과가 있고 소변을 잘 보지 못할 때에도 사용한다.
안타깝게 고란사에서도 고란초는 보기 힘들어 유리관에 표본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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