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화한 저 넋이여
사육신 공원에서 640번 버스를 타고 국립 현충원에 내리니까 현충원 울타리에 노란 애기똥풀이 올망졸망 모여 피어 있다.
국립 현충원은 예전에는 국립 묘지라고 했었는데 명칭이 바껴있었고 참으로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스컴에서 현충원이라고 말을해도 내 기억 속에는 국립묘지로 남아있었다.
현충원 정문 양 옆에는 꽃장사들이 벌써 꽃을 팔고 있었는데 현충일이 다가와서 나와 파는지 평소에도 파는지는 모르겠다
이곳 현충원에는 당숙이 계시는데 어른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위치도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는 국립 묘지에 함 가려면 교통이 불편해서 찾아가기가 참 힘들었다. 다행히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께서 공직에 계시다보니 서울시에서 차량 지원을 해줘서 해마다 편하게 다녀올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당숙의 남은 가족들이 다녀오곤해서 나는 중간쯤이라는 것만 알고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현충원은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로 창설되어 전사 또는 순직군인과 군무원 및 종군자의 영현을 안장하였으나, 10년 후인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국가원수, 애국지사, 순국선열을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경찰관, 전투에 참가한 향토예비군 등이 추가 안장되었다.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관리소라는 관리기관 명칭이 국립현충원으로 변경되었고 2006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었다. 계속된 안장으로 서울의 국립현충원이 만장되자, 1979년 국립대전현충원을 창설하여 그곳에 안장하고 있다
충성분수대는 국가의 자유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밑거름이 된 영령들의 위훈과 그 정신을 상징하여 1976. 11. 5. 건립된 것으로, 화강암 좌대를 상.중.하단으로 구분하고 그 밑에는 두 마리의 청룡 동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의 태극기를 받쳐 들고 한 손으로 횃불과 월계수를 들고 있는 남녀상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국가를 상징하고, 중단의 남녀노소상은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며 애국애족하는 국민을 상징하였고, 하단의 육.해.공군.해병대. 예비군 등 6인의 동상은 국가와 국민의 수호에 충성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위훈과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이 분수대는 높이 13m, 원형직경 31.2m에 60개의 노즐로 구성되어 있다.
충성분수대 중심으로 양쪽에 길이 나있는데 이 길은 오른쪽 길이다.
멀리 현충원이 보이고 예쁜 꽃시계가 묵묵히 똑딱똑딱 세월을 쫓아 보내고 있다.
왼쪽 길 옆에 평화의 집 지붕이 보이고 . . .
왼쪽 길 건너 평화의 집으로 간다. 너무 더워서 음수료 사러 . . . ㅎㅎㅎ
평화의 집은 유가족과 참배객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안장및 참배용 물품(생화, 조화)과 각종 음료수, 다과류, 일용품 등을 판매한다
현충원의 구름다리
현충원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참 좋다
현충지는 1985. 10. 30. 준공된 이 연못은 당초 이곳에 있던 웅덩이를 기존의 형태를 살려 넓이와 깊이를 조정하여 조성한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가장자리는 자연석으로 꾸며 경관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 연못은 전묘역 잔디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스프링쿨러의 용수원이 되기도 한다
요즘 찔레꽃이 한창 피어 주변을 온통 향기롭게 한다
아이리스를 사랑한 화가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기 위해 진짜 꽃같은 꽃을 그려줄 것을 원했고 몇날 며칠을 고심 끝에 꽃을 그려 바쳤으며 아이리스는 그림을 본 순간 너무 마음에 드는 꽃그림이여서 속으로는 은근히 기뻐하였다.
그러나 짐짓 못마땅한 투로 " 이 그림에는 향기가 없네요." 벌과 나비가 오지 않는군요. 그 때였다. 어디선가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그림 꽃에 살포시 내려앉았다.는 전설의 꽃 아이리스
하얀 연꽃은 봉우리마다 방긋방긋
충원승천상은 조국과 겨레의 무한한 영광과 발전의 토대를 이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하고 거룩한 삶이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를 기원하는 탑으로 1992. 10. 10. 남산미술원장 이일영씨에 의해 제작 준공되었으며 바닥 화강석 원둘레석의 직경이 13m, 높이 15m로 된 동상이다
현충관은 안장식, 영결식 등 각종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1980. 12. 31. 건립한 이 건물은 연건평 1,470.7㎡의 철근콘크리트 기와조 2층 건물로 기둥, 주춧돌, 지붕 등은 고전 한국식이고, 기타 부분은 현대식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며, 건물 내부에는 349석의 좌석이 설치되어 있다. 1988. 3. 29. 현충선양관 개관 이후에는 주로 교육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해파리같이 서있는 나무들
현충관 옆에 불두화가 흐드러지 게 피어 있다.
포병장교 충혼비는 6.25전쟁 중 포화를 뿜어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전몰 포병장교가 340 명에 이르렀으나 이들 중 88위만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 252위는 그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이들의 충의와 위훈을 추앙하고자 “충혼비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포병출신장교들이 참여하여 ’64. 6. 25. 포병장교 충혼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 비는 유품전시관 우측에 위치하고 있고 가로 2.8m, 세로 0.7m, 높이 1.6m이며 비 위에 포를 얹고 비 전면 중앙에 동판을 두어 여기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 포화를 뿜어 조국을 지킨 포병 용사들 고요히 잠드시라
유채꽃과 아이리스
함박꽃(작약)도 활 ~ 짝
아, 저 산화한 넋들들 어찌 하오리. 울컥 목이 매인다
곳곳에 이런 쉼터들이 있어 참배객들에게 잠시 쉴 공간을 주어 좋다. 나도 잠시 쉬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 그냥 사진으로만 담았다.
구름다리 상류의 풍경
학도 의용군 무명 용사탑
이 탑에는 6.25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김춘식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에 안장되어 있다. 6.25가 발발하여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약 5만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구국전선에 자진 참전하여 포항지역을 비롯한 각 지구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7,000여 명이 전사하였으나 시신이나 무덤 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곳에 모셔진 48위는 당시 포항전투에서 중대급 규모의 학도의용군이 괴뢰군 전초부대와 분투하다가 전몰하여 당시 포항여자중고등학교 부근에 가매장되어 있었으나 ’63. 9. 24. 국무회의에서 이들을 국군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 ’64. 4.25. 대한학도의용군 동지회 주관하에 국군묘지 제5묘역에 안장하였다가 ‘68. 4월 현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 이장하게 되었다.
5인의 애국투사상
현충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희생정신을 추앙하면서 동,서,남,북 4방향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十(십자)형으로 된 서울현충원을 상징하는 탑이다. 이 탑의 앞쪽에는 오석평판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제단 뒤쪽에는 헌시가 오석에 새겨져 있으며 제단 앞에는 향로와 향합대가 놓여 있다.
탑의 좌우에는 화강암 석벽이 펼쳐져 있으며 좌측석벽 끝에는 5인의 애국투사상이, 우측석벽 끝에는 5인의 호국영웅상이 각각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탑의 내부에는 위패봉안관이 있고 위패봉안관 지하에는 납골당이 설치되어 있다. 이 탑은 화강암 돌붙임 공법으로 1년여간의 공사 끝에 1967. 9.30. 준공 되었으며, 탑의 높이는 31m이다.
현충탑 제단 오석에 새겨진 헌시는 이은상 선생이 지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한 헌시(일명"현충시"라고도 함)가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어라? 세 여인이 분향을 하더니 뒤로 들어가네. 나도 따라가보았더니 . . .
와 ~ 이런 곳이 있었다니, 영령들에게는 죄스럽지만 아름다운 곳이다
탑의 내부에는 위패봉안관이 있고 위패봉안관 지하에는 납골당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에는 선녀들이 그려져 있는데 영혼들을 위로하는 듯 . . .
옆문으로 나오니까 위패 봉안관이라고 되어 있다
부부 위패 4기
육사7기특별동기생추모탑은 6.25전쟁중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육사 7기 특별 동기생 전몰용사의 숭고한 넋과 거룩한 희생을 위무, 추모하고자 생존한 동기생들이 1963. 8. 17. 세운 탑으로 1986. 10. 12.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개축시 탑안에 동기생들의 유품과 기념품, 사진 등을 함께 봉안하였다
충무정은 1960년 11월 14일 신축하여 1978년 3월 31일 개축한 건축물로서 면적은 22㎡이며 지면에서 1.2m의 높이에 화강석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의 정자를 세웠는데 건축양식은 추녀 끝을 하늘로 향해 올리는 등 순수 고전 한국식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역대 대통령들의 묘가 있다기에 가본다
충성거북상의 거북은 충직성과 장수를 상징하는 영물이라 하여 예로부터 거북상은 충신의 사당이나 비각 앞에 세워 왔었다. 이 거북상은 충청남도 조치원 어느 누각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운반되어 있던 것을 동화물산(주) 김봉록 씨에 의해 1958년 7월 서울현충원으로 옮기어졌다.
고 이승만 대통령 묘역인데 와 ~ 왕릉 못지 않게 큰 봉분의 무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사상과 민족계몽에 투신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하다가 광복과 동시에 귀국, 초대 대통령으로 정부 수립과 반공체제 확립에 많은 공헌을 남기고 4.19로 하야 하였다. ’65. 7.19. 하와이에서 서거하여 동년 7.27.가족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랜체스카 여사는 ’92. 3.19. 서거하여 ’92. 3.23. 가족장으로 이 곳에 합장되었다
[전면]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
[후면] 한국의 큰 별 세계를 움직였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이곳에 고요히 잠드시다 구십평생을 자주와 독립으로 나라위해 몸 바치신 박사의 위대한 모습을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여 하와이 동지들 정성을 모아 눈물을 마시며 삼가 이비를 세운다
이 비는 하와이 한인동지회가 하와이 근해바다에서 채취한 돌로 건립되었다
세계를 움직이신 웅대한 기상이시여 , 거룩한 나라사랑 민족의 은인이시여, 아무도 범할수 없던 순수하고 고결한 영원한 한국인이시여, 반도산하 읊으신 민족시인이시여, 오늘도 임 그리며 오가는 동작의 성지에 주님의 은총중 영복을 누리소서
1998년 광복절에 정부와 국민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이 단풍나무 씨앗은 노란색이네. 홍단풍, 청단풍 씨앗이 이렇게 다른건가?
고 김대중 대통령 묘역 옆에 창빈 안씨의 묘가 있어 올라가 보았다
창빈안씨[1499~1549]는 경기도 시흥시[옛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하였다. 아홉 살 때 궁궐에 들어가 법도를 배우고 부덕을 쌓았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대비의 후의와 중종의 총애로 1520년(중종 15) 상궁이 되었고, 1529년 숙원을 거쳐 1540년 숙용까지 올랐다.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으로 물러나려 하였으나,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중에 계속 머물렀다.
1549년(명종 4) 친정에 갔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본래 1550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묘소를 마련하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듬해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으며, 동작릉이라고도 한다.
고 김대중 대통령 묘역에서 본 창빈 안씨 묘
창빈 안씨 묘역에서 내려와 이 길 오른쪽에 고 김대중 대통령 묘가 있다.
길이 참 이쁘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경제위기의 국난을 극복하셨고 우리나라를 민주주의와 인권국가, 경제와 사회복지 선진국, 정보화 강국으로 이끄셨으며 자주 외교를 펼쳐 나라의 위상을 높이셨다.
2000년 12월에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시었다. 2003년 2월 퇴임하신 후 세계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해 헌신하시다가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하여 8월 23일 국장으로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묘역을 먼저 보고와서 그런지 김대중 대통령의 묘역은 소박해 보인다
[전면] 당신은 우리입니다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
어둠의 날들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다시 일어나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입니다
당신은 민족 통일입니다.
미움의 세월 서로 겨눈 총부리 거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것
마구 달려오는 하나의 산천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평화입니다 우리입니다
당신은 이제 세계입니다.
외딴 섬 아기 자라나서 겨레의 지도자 겨레 밖의 교사입니다.
당신의 고난 당신의 오랜 꿈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의 내일입니다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
[후면] 나는 내 일생이 고난에 찬 일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불행한 일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일생이 참으로 값있는 일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많이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르게 살려고, 국민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려고,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 세계의 모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세계의 모든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해온 일생이었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계단 위로 올라가면 애국지사묘역인데 이 앞을 지나가는데 관람 시간이 끝났다고 호르라기를 불며 나가라고 소리치신다. 박정희 대통령 묘역을 가야하는데 . . .
"아저씨 ~ 박정희 대통령 묘역에만 잠깐 올라갔다올게요." 아저씨가 다답을 하든말든 막 뛰어 올라갔다.
애국지사묘역에는 애국지사 묘역에는 구한말과 일제치하에서 항거해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하시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14분이 모셔져 있다
함박꽃 한송이가 참 이쁘게 피어있다.
이팝나무 꽃이 피었네. 한 컷 담아가야 되는데 아저씨는 나가라고 소리치시고 그냥 가자니 꽃이 날 부르고, 에이 ~ 모르겠다. 하고는 얼른 한 컷 찍고 박정희 대통령 묘역으로 뛰어 올라갔다.
에구 ~ 장군묘역인데 올라가보지 못했다.
드디어 고 박정희 대통령 묘역까지 왔는데 . . .
에구 ~ 계단이 우째 이리 많은겨. 헉헉 . . .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육영수 여사님께서 나란히 계시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랜 가난을 물리치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고 민족중흥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안타깝게도 1979. 10. 26. 불의의 총탄에 서거하여 온 국민의 애도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74. 8.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하여 8.19.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묘소에는 비석과 내외분에게 바친 헌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면]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광풍 낙엽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주렁 열렸소이다.
오천년 이 겨레의 찌든 가난 몰아내고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
자유와 평화통일, 그게 님의 이상과 소원 착한 국민되라시고 억센나라 만들다가
십자가 지신 오늘 붉은 피 흘리셔도 피의 값 헛되지 않아 보람 더욱 찾으리다.
육십년 한평생 국민의 동반자였고 오직 한길 나라사랑 그길에 바친이여
굳센의지 끈질긴 실천 그 누구도 못지을 업적 민족사의 금자탑이라 두고두고 우러보리라.
우리는 슬기론 겨레 어떤 고난 닥쳐와도 끼치신 뜻을 이어 어김없이 가오리다.
몸 부디 편히 쉬시고 이 나라 수호신되어 못다한 일 이루도록 큰 힘 되어 주소서
[후면]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시어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시다가 1979년 10월 26일 서울에서 서거 11월 3일 국장으로 안장되시다 1980년 2월 2일 국민의 뜻을 모아 세우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 영전에
박꽃으로 마을 길이 눈부신 밤
하얀 몸매로 나타나신 이여 조용한 걸음을 옮기시어
우리 서로 만나던 그때부터 당신을 고운 아씨로 맞이했읍니다.
흰 샘물의 미소로 이 땅의 갈증을 풀어주시고 길잃은 늙은이들과 상처입은 군인들
놀이터가 없는 어린이를 껴안아 그 삶은 보람차고 또 벅찼읍니다.
때로는 무르익은 포도송이들과 장미와 난초들의 향기로 이룬
즐거운 모임의 주인으로 임하여 부덕과 모성의 거울이 되시었거니
당신의 장미는 아직 시들지 않았고 뽕을 따서 담으시던 광우리는 거기 있는데
저기 헐벗은 고아들과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의 어루만짐을 기다려 서 있거늘
홀연 8월의 태양과 함께 먹구름에 숨어 버리신 날 하늘과 땅으로 당신을 찾았읍니다.
우리 한목소리 되어 당신을 불렀읍니다.
쓰라린 상처와 오한에 쫓기는 당신을 구하려 검은 숲을 헤맸읍니다.
사무쳐 그리운 여인이시여
돌아서 당신의 삶을 끝내고 가시는 길
이토록 다 버리고 가시는 길에 비옵니다 꽃보라로 날리신 영이시여
저 먼 신의 강가에 흰 새로 날으시어 수호하소서 이 조국 이 겨레를
공작지는 박대통령 내외분 묘소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박정희 대통령 안장시 사용한 운구차를 보관하고 있는 대여보존관 바로 옆에 있다
대여보존관은 박정희 대통령 안장시 사용한 운구차를 원형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1980. 5. 7. 건립한 면적 165.9㎡의 조립식 반영구 건물이다. 이 건물은 알루미늄 판제와 특수 투명유리를 사용하여 제작함으로써 관람이 용이토록 하였다
나무 가지가 치맛자락 늘어진 듯 신기하게 생겼네.
장군 묘역
나가는 길에 장병묘역에서 멀리 충성분수대와 현충관이 보이고
산화한 넋을 위로하는 듯 까치가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다닌다.
산딸나무 꽃이 균형 잡힌 십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예수님이 운명하신 십자가가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호랑가시나무와 더불어 성스러운 나무로 취급되고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나무이다. 열매가 딸기와 비슷한 모양으로 생겨서 '산의 딸기나무' 란 의미로 산딸나무라 부른다.
50년현지임관 전사자추념비 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창군 초기 지원 입대하여 군에 복무중이던 많은 군인들이 현지 임관되었다. 이들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으나, 이들 중 377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순직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의 값진 희생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차 잊혀져 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50년도 현지임관 생존 회원들은 전쟁 중 순국한 동기 회원들을 영원히 추모하고자 비를 건립키로 하고, 생존 동기생과 유족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9호선 동작역사 안인데 저 끝으로 가면 4호선과 환승이 가능하지만 발이 너무 아파 한걸음 걷기도 힘들다. 잘 신지 않던 운동화를 신고 나왔더니 한나절 사육신 공원으로 현충원으로 돌아다녔더니 발이 걷지 않겠다고 버틴다.
그래서 버스를 타려고 위로 올라갔더니 시내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
에구에구 ~ 하는 수없이 대방역으로 가면 바로 전철역이 있겠지 하고 갔더니 대방역이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망했다. 그냥 4호선 황승역으로 갈걸 조금 덜 걸으려다가 걸을 것 다 걷고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하고 잉잉 조금 편하려다가 더 고생하고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