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이 사칠신이 된 사연
사육신이 사칠신이 된 사연 |
아, 그런데 날씨가 이렇게 더울 수가 . . .
집에만 있을 때는 날씨 예보를 들어도 덥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밖에 나가보니까 봄 끝자락이 한 여름인 것 같이 뜨거웠다. 아흐 ~ 더워라.
사육신 공원은 가끔 지나치긴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노량진역 부근에서 가깝다는 정보에 방학역으로 가서 1호선 전철을 타고 노량진역으로 갔는데 노량진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하던 곳이 한 정거장을 더 걸어가도 보이지가 않는다.
에구 ~ 더워라. 요즘 날씨가 이렇게 더웠남?
편의점에 들어가 길도 물을겸 시원한 음료라도 하나 살 생각에 점원에게 물어보니
이런 ~ 모른단다. 그런데 편의점 바로 길 건너에 사육신 묘역 공원이 있었다는 것 . . . ㅎㅎㅎ
사육신 공원 담장의 매화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 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 함석헌 선생, 씨알의 소리 중에서 -
공원 입구가 왼쪽 담장 끝이라 저 끝에서 걸어내려왔다.
사충서원은 1725년 경기도 과천(현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에 신임옥사 4충신, 곧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725년 사액을 받았다. 이는 노론이 득세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는데,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됨에 따라 신임옥사의 뜻은 뒤집어지고 4대신은 다시 죄인이 되어 서원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뒤 경신처분으로 4대신은 다시 충신으로 인정받게 되고 1756년에는 서원도 다시 세워져 사충서원이라 부르게 됐다. 이처럼 당쟁에 관련되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이 서원은 영조에게 충성을 다한 4대신의 서원이라 하여 영조 이후의 역대 임금들에 의해 특별한 은전을 받았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들을 없애려 할 때에도 헐리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1927년 서원 부지가 철도용지로 편입되어 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겼으나, 한국 전쟁으로 서원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우는 것이 힘들어지자 1968년에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으로 옮겨졌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 향기로운 꽃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무슨 꽃? 아카시아 꽃향기 같은데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진다
홍살문은 궁전·관아·능·묘·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홍문이라고도 한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언덕을 올라가며 본 왼쪽 풍경
사육신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수양대군)에 반대해 단종복위를 꾀하고 명 사신의 환송연 때 거사하기로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사육신 문제는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관련 문중의 탄원으로 제기되어,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기존 사육신의 기록도 존재하고 김문기 사육신론도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에 대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대하여 사육신묘를 관리하는 서울시와 그리고 교육부, 문화공보부, 관련 학계가 심도있게 논의하였고, 최종적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의견을 참조하여, '기존의 사육신을 변경하지 않고, 김문기 선생을 현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사육신이 사칠신이 되었다.
불이문은 흔히 불가에서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래하나 이곳 사육신 의절사에도 불이문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는 성삼문이 국문을 당하면서 세조에게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임금이둘이 있을 수 없다."라고 외친 것에서 불이문이라 하지 않았을까.
사육신과 김문기의 위패가 모셔신 의절사
1955년 5월에 민절서원 터에 세워진 육각의 사육신비
사육신을 추모하고자 숙종7년(1681년)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6년(1782년)에는 신도비를 세웠다
팥알만한 꽃이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손짓에 엎드려 한 컷 담았는데 꽃이름은? 모르겠다.
내삼문인 불이문으로 들어가면 의절사가 있다. 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위패는 동쪽 방향으로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이제 의절사 뒷문으로 나가 묘역으로 간다.
이 계단을 오르면 묘역이 있는데 . . .
왼쪽에 비석 하나가 댕그러니 혼자 서있다. 묘가 없어진 성승 이라는 분의 묘비인가?
세조에게 참수를 당한 시신들을 어느 스님(매월당 김시습이라 전함)이 성승ㆍ박팽년ㆍ유응부ㆍ성삼문ㆍ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조에는 성삼문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ㆍ박팽년을 비롯한 성승ㆍ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려졌으나 묘역 성역화 하면서 하위지ㆍ유성원 ㆍ김문기의 가묘를 만들어 현재 실묘 4기와 가묘 3기 모두 7기가 모셔져 있다
박팽년의 묘가 되나?
위패와 같은 방향으로 하위지ㆍ성삼문ㆍ유성원의 묘가 되겠고
묘 잉(언덕)에서 내려다 본 봉분의 모습
이개ㆍ유응부ㆍ박팽년ㆍ김기문 순서로 모셔져 있는 것 같다
묘 잉(언덕)에서 내려다 본 봉분의 모습
민절서원 터의 돌기둥인가? 안내 표지가 없다
묘역 뒤로는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좋은 조망권을 잃은 것 같다.
산책삼아 한바퀴 돌면 좋은 곳이라 생각된다. 이왕이면 역사 공부까지. . . ㅎㅎㅎ
다시 의절사 안으로 들어가 공원 쪽으로 가보자
의절사에서 본 불이문
의절사 왼쪽으로 올라가면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그곳으로 올라가본다
팔각정이 있던 것을 헐고 사육신 공원 역사관이 들어서 있는데 아직 공사 중 . . .
아, 그런데 이름이 바껴있네
뒷 모습
조망이 가장 좋다는 전망대
이곳에서 여의도가 보이는구나
전망대 넘어 보이는 화단, 이른 봄에는 꽃들이 만발했던 것 같은데 예뻤을 것 같다
기념관 앞 쪽에서 본 풍경 밑으로 내려가보니
아이리스와 영산홍이 색스럽게 피어있다.
아이리스는 외떡잎식물 백합목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계손·수창포·창포붓꽃이라고도 한다 4~5월에 흰색, 자주색, 노란색, 청자색 꽃이 피며 민간에서 뿌리줄기를 피부병·인후염 등에 쓴다.
이제 사육신 공원을 다 둘러 보고 나가면서 본 솟대에서나 봄직한 기러기
사육신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립 묘지, 지금은 국립 현충원이라고 이름이 바뀐 곳으로 간다. 그런데 정말 날씨 뜨겁다. 올 들어 가장 기온이 높은 날이였다고 한다. 날씨 생각 않고 나왔더니 무지 덥다. 앞으로 뜨거워서 여행을 어떻게 다닐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