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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종과 아름다운 탑들

智美 아줌마 2011. 1. 22. 08:53

보신각 종과 아름다운 탑들

 국립 중앙 박물관에는 국보, 보물로 등록된 아름다운 탑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원래 있던 절터들이 사라져 있던 곳에 있지못하고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그래서 탑들의 관한 정보들을 모아모아 보았다.

 

 보신각종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18m, 입지름 2.28m이다.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 현수되어 제야의 종으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1395년(태조 4) 종로 운종가에 종각을 세웠고 권근이 찬문을 쓴 종을 매달았다.

이 종은 1468년(세조 14)에 다시 주조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보신각종은 서울의 서대문인 돈의문 안 정릉사에 있었으나, 정릉사가 폐사되어 원각사로 옮겼다가 광해군 11년(1619)에 현재의 보신각 자리(서울 종로)에 옮겨져 파루(오전4시)에 33번, 인정(오후10시)에 28번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데 쓰였다.
이 종을 중종 때 숭례문(남대문)에 걸려고 하다 임진왜란 뒤 종로 종각에 걸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 보존하고 있다.

타종 횟수는 불교의 우주관인 '28계 33천' 신앙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정 때 28번은 불교 철학에서 천체를 28개로 분류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에 있는 별에게 밤의 안녕을 부탁한다는 의미가 있다. 파루 때 33번은 관세음보살이 하늘에 있는 33개 세계만큼 육신을 쪼개어 속세의 중생을 구제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보신각은 '종루'로 불리웠던 곳으로 종을 달아 조석을 알리던 곳인데, 고종32년 (1895)에 '보신각(普信閣)'이란 사액을 내린데서 보신각이라 불리어졌다.

종로구간 지하철 공사 때 지하 4~5m 아래에서 원래의 종각 터가 발견되었다. 당시 거대한 초석 11개와 기단에 사용되었던 장대석 몇 점도 함께 출토되어 현재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 뜰에 옮겨 놓았다.

 보신각종은 양식과 조식에 큰 특징은 없지만 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 에밀레종)에 비견되는 대종이다. 종 위에는 용뉴가 있을 뿐, 용뉴에서 반원을 그리며 흐른 종견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표면은 거칠다. 종견 밑에는 턱이 져 있으며 종견부터 윗부분과 종신을 따로 만들어 붙인 자리인 듯하다. 종신에는 중앙에 3조의 굵은 융기횡대가 있고 종구에서 약간 위에 간격을 둔 2조의 역시 굵은 융기횡대가 있을 뿐 다른 조식은 없다.

 그물이 있어 상부의 용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새로 만든 보신각종은 새해맞이 타종을 위해 만든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복제품이다.(자료사진)

 

 북묘비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관우를 기리기 위해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세운 북묘에 있던 것이다. 북묘는 서울 명륜동 흥덕골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비석은 4년 후인 고종 24년(1887년)에 세웠으며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기리게 된 경위와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고종 임금이 직접 짓고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고 한다.

 나주 서문석등은 본래 전라남도 나주시 성북동의 나주 읍성 내 서문 안에 있던 석등으로, 192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져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되었다. 이전될 때 팔각 화사석과 보주가 파손되어 현재 새로 만들어 끼워놓았다. 긴 팔각 기둥돌은 간주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새겨져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선종 10년(1093)에 석등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현화사 석등은 고려 현종 10년(1020)에 세워진 석등으로 원래 경기도 개성 부근의 현화사 터에 있다가 1911년 서울로 옮겨왔다. 당시 국가 대찰로 창건된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석등 앞에 배례석은 공양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등공양을 할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석등은 일반적인 팔각 석등과 달리 사각 석등으로 되어 있고 불발기집도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불발기집에 세운 작은 네 기둥은 석등 밑의 간주석(받침 기둥) 모양을 축소한 형태이며, 지붕은 듬직하고 안정감이 있다.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은 도의선사의 제자이며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제2조 선사인 염거화상의 묘탑으로 원래는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탑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현지에서 불법으로 몰래 옮겼다가 발각되어 경복궁으로 옮겨 오고 1986년 다시 중앙박물관 정원으로 옮겨다.

경복궁으로 옮길 적에 이 탑 안에서 금동제 탑지가 나와 이 탑이 844년에 이루어진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라에서 고려에 걸쳐 고승의 묘탑으로 8각 원당형 부도가 유행하였으며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은 신라 후기의 고승 진경대사의 사리탑으로, 탑비와 함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의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191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 관리하고 있다.

봉림사는 신라 효공왕(재위 897∼911) 때 원감 국사 현욱(787∼868)이 창건한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성립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봉림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다. 진경대사는 법명이 심희(854∼923)로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이다. 봉림사에 머물며 크게 교화 활동을 폈으며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진경은 시호이고 보월능공은 탑호이다.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보물361호)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탑비로, 보리사터에서 발견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대경대사는 9세에 출가하여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태조 22년(939)으로,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거북 받침돌의 거북 머리가 용머리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것은 통일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머릿돌의 구름과 용이 매우 생동감있게 조각되었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보물 제365호)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원래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에 있었다. 이를 1931년에 경복궁으로 옮겼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가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보물 제190호)은 고려 시대 초기에 활약한 선승 원공국사의 묘탑으로 원래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터에 있었던 것을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 집의 정원으로 옮겼다가 1948년에 서올 경복궁 안으로 옮기고 다시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다. 탑비와 이 부도탑의 지대석이 거돈사지의 원위치에 그대로 남아있다.

원공국사는 법명이 지종(智宗, 930∼1018)으로 경기도 양평 사나사(舍那寺)에 머물던 인도 승려 홍범(弘梵)에게서 득도하였고, 광종 10년(959) 중국 후주(後周)에 유학하여 공부하였다. 970년 귀국한 뒤 975년 중대사와 삼중대사가 되었다. 그 뒤 대선사를 거쳐 왕사에까지 올랐다. 현종 9년(1018) 거돈사에 들어가 그 해에 입적하였다. 건립연대는 원공국사탑비가 고려 현종 16년(1025)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볼 때 역시 그 무렵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장명등

 

 

 

갈항사 동서 3층석탑(국보 제99호)은 경북 김천(금릉군) 갈항사 금당( 金堂 ) 남쪽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쌍탑으로 통일신라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석탑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갈항사는 신라 효소왕 때인 692년 승전이라는 고승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찰들처럼 중건이나 중창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아 고문헌에 따르면 조선 중기까지에도 갈항사라는 표기가 남아있었다고 하니, 그 이후 갑작스런 폐사가 된 것으로 추측한다.

1914년 쌍탑중 동탑의 기단부에서 4줄짜리의 금석문이 알려지게 되는데, 이후부터 도굴꾼에 의해 탑내 유물이 도난당하고, 동탑에 새겨진 금석문은 신라 경덕왕(758년) 때 세워진 탑임을 알리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수많은 신라 석탑 가운데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아울러 금석문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석탑이다.

그리고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내용은 "두 탑은 천보 17년 무술(758)중에 세웠는데 오라비와 자매 3인의 업으로 이루었다. 오빠는 영묘사 언적법사이시며, 자는 조문태황후이시고, 매는 경산대왕의 이모이시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 . .

 

 홍제동오층석탑(보물 제166호)는 현재 기단부가 없고 탑신부 5층만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으나 시가지 확장에 따라 1970년에 경복궁 경내로 옮겨졌다가, 1996년부터 현재의 위치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원위치는 고려 정종 11년(1045)에 창건된 사현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옮겨질 당시부터 기단부가 없이 자연적인 바위 위에 탑신이 세워져 있었는데, 탑에서 기단부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볼 때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마 후대의 개수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탑이 서 있던 절터는 안성 칠장사에 있는 혜소국사비의 내용에 의하면 고려 정종 11년(1045)에 세워진 사현사로 추정되며, 탑이 이루어진 시기도 이 무렵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달사 쌍사자 석등(보물 제282호)은 여주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천수사 오층석탑은 강원도 원주 천수사 절터에서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진 후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탑의 형태는 5층으로 기단부의 하대갑석(下臺甲石) 아래는 현재 결실되었다. 탑신의 높이는 2층부터 급격히 낮아져 있고 옥개석 밑의 받침은 각 층 모두가 3단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석탑각부분의 결손이 심한 고려말기의 석탑이다

 천수사 3층석탑은 탑의 몸체를 받히고 있는 기단부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기단형식이다 탑신부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과 2층 석탑은 굄돌이 놓여져 있다. 탑 꼭대기의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 장식만 남아 있다.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보물 제 358호)은 보제존자 나옹(1320~1376년)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고려 우왕14년(1388년)에 세운 승탑이다. 강원도 원주의 원소재지에서 1919년 경복궁으로 옮겨 세웠다가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보통 승탑이 팔각 집모양이거나 종모양을 띠는 것에 비해 이 승탑은 특이하게 불탑과 같이 네모난 형태의 두 탑으로 이루어져 매우 이채롭다. 나옹의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이 탑 외에도 그가 입적한 여주 신륵사와 그가 주지로 있던 양주 회암사 터에도 남아 있다.

 옛날 만원권 지폐의 경회루 오른쪽 동그라미 표시부분에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이 있다.(자료사진)

 영전사보제존자사리탑(보물 358호)에서 나온 사리기이다. 원주에서 1919년 경복궁으로 옮겨 세울 때 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그중 서탑에서는 홍무21년명탑지석, 은제도금6각소감(높이 4.5cm), 은제원통합 (높이 4cm), 청자대접(지름 19.2cm, 높이 6.2cm)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동합과 납석제합이 발견되었다. 특히 서탑에서 발견된 지석으로 묘 탑임이 밝혀졌다.(자료사진)

 안흥사 오층석탑은 경기도 이천시 안흥동과 갈산동 경계에 자리한 안흥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2005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현존하는 이천 지역의 석탑 중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된 유일한 석탑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점으로 미루어볼 때 통일신라시대 말기 또는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남계원 칠층석탑은 1915년 경기도 개성시의 덕암동에 있는 남계원터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왔다. 탑이 있던 곳이 전에는 개국사 터로 알려져 탑의 이름도 '개국사탑'으로 불려왔으나, 남계원터로 밝혀져 탑의 이름도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할 때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으로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의 사경으로 추정되며, 1283년(충렬왕 9) 중수 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미르는 용을 뜻하는 옛말로 박물관이 위치한 용산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미르폭포, 소나무 아래로 작은 폭포 물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