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안개 낀 장충단 공원

智美 아줌마 2010. 12. 3. 21:41

 

 주목나무 열매

 구기자 열매

 측백나무 열매

 지하철 3호선 동국대 역 입구에 사명대사 동상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스레 보게 되었다.(1968년 5월11일 제막)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대사는 1559년 경북 김천 직지사로 출가한뒤 2년 만에 승과에 합격했으며 1575년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으나 거절하고 서산대사인 휴정의 제자가 됐다.

대사는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1590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건봉사에서 승병을 규합,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해 3월 서울인근의 노원평과 우환동, 수락산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특히 대사는 국방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팔공산성과 금오산성, 용기산성, 남한산성, 부산성 등을 축조하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보내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대사는 특히 1604년 강화교섭을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전란 당시 잡혀간 3천5백여명의 동포들을 데리고 귀국했으며 1610년 8월 해인사에서 입적, 해인사에 부도탑이 있다.

 장충단비는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신하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과 함께 세운 비.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다.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이다.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광무 4년(1900)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마구 설치하여 ‘장충단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광복 후 일제가 세웠던 건물을 모두 헐면서, 비도 다시 찾아 세우게 되었다.

 수표교는 조선 세종 때 만든 다리로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는 다리로 다리 돌기둥에 경(庚)·진(辰)·지(地)·평(平)이란 표시를 해서 물의 깊이를 재었다. 영조 때는 다리 동쪽에 준천사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였다. 2003년 6월 청계천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청계천 위에 원래의 수표교를 본 따 만든 새로운 수표교도 생겨났다

 

 돌기둥에 눈금이 보이죠?(자료 사진)

 오래 전에는 이곳에 분수대(1968년 말)가 있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철거되고 습지 생태 공원으로 자연 친화적으로 변신(?)을 하였다.

 다담에뜰이라는 전통 찻집, 작년에는 못본 것 같은데 새로 생겼네,하고 자료 검색을 해보니까 올 여름 장충단공원이 새단장을 하면서 오픈한 곳이란다.
참고로 "다담"의 뜻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내놓은 다과를 말한다고 . . .

 앞으로 가보실 분들은 메뉴판 참고하시고 . . .

 이준열사 동상(1964년 7월14일 제막)
이준 열사(1859~1907) 한말의 항일애국지사.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개혁당, 대한보안회, 공진회,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했다. 보광,오성학교를 세웠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위종 등과 합류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참석 못하고 순국했다.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에서 출생한 한글학자로 호는 외솔이다. 조선어학회 창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에 참여,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하였다. 광복 후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잡았다. 연세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는《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등이다

 산책로 공사가 한창인데 한가하게 그곳을 얼쩡대는 것 같아 일하시는 분들께 조금 죄송한 마음이 . . .

 남산 제2터널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구 장충동에서 용산구 군인아파트를 잇는 터널로 양택식 서울시장이 공사 개요하였다.

 유관순 동상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3.1독립운동 기념탑, 1999년 3.1절 80주년 기념으로 제막

 

 

 

 

 국립극장 올라가는 길(차도길)

 국립극장 올라가는 무지개길

 

 

 무지개길 바닥에는 별들이 총총 . . .

 KB국민은행 청소년하늘극장의 벽시계

 언제나 정겨운 등나무길

 분수대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29일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설립되었다. 설립과 동시에 국립극단을 창단하고, 1950년 4월 30일 창단공연으로 연극 《원술랑》과 《뇌우》를 무대에 올렸다.

6·25전쟁 당시 대구로 이전하였다가 1957년 6월 1일 다시 서울로 이관하고, 1973년 10월 17일 장충동에 국립극장을 개관, 1991년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극장인 해오름극장과 소극장인 달오름극장, 공연 성격에 따라 무대가 바뀌는 별오름극장, 원형 야외무대인 하늘극장 등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