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순교성지
남당항을 출발하여 다시 무창포로 향하던 중 얼핏 눈에 띈 "갈매못 순교성지" 이정표.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에 기록해둔 곳이다.
언제 가보나를 가끔 생각하던 곳인데 이번 여행 길에서 가볼 수 있게되어 얼마나 좋았던지 . . .
갈매못 성지를 간 것만으로도 무창포 조개잡이 여행은 대만족이였다.
앞으로의 남은 여행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함께한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한다.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鰲川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순교성지로 1866년 3월 30일 병인박해 때 체포된 프랑스 선교사인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 5명이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를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동백열매가 익을대로 익어 탱탱하니 곧 터질 것만 같다
예수성심상
예수 14처 석각
승리의 성모성당
순교복자비
위 소나무 주변에 옹기종기 버섯이 모여 자라고 있다.
성모상
본듯한데 무슨 꽃인지 기억이 안 난다. 참으로 신비롭게 생겼는데 . . .
샐비아와 같은 꿀풀과 식물로 scarlet sage라는 깨꽃이란다.
기념관및 야외제대
왜 모래사장에서 참수 되었을까?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기념관 내부
참수된 머리 모형
다블뤼(Daveluy; 1818-1866) 주교는 1841년 12월 사제로 서품되어 1843년 10월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극동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마카오대표부를 거쳐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했다.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가 붙잡혀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피신하여 큰 고초를 겪었다.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예산 고덕면 거더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튿날에는 위앵 신부와 오매트르 신부가 자수하여 그와 함께 서울로 압승되었다.두차례의 신문을 받은 끝에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1866년 3월 30일 이곳 갈매못 모래사장에서 순교했다.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오매트르(Aumaitre) 신부는 1862년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6월 30일 조선에 입국, 수원에서 전교하던 중에 다블뤼 주교로 부터 자수하라는 편지를 받는다. 다블뤼 주교는 무죄한 신자들이 잡혀서 재산을 빼앗기고 협박과 고문을 못이겨 배교하는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라고 했는데, 서양 선교사들이 죽으면 신자들은 해치지 않 을 것이라 생각되어 자진해서 죽자는 . . .
오매트르 신부는 거더리로 내려와 자수, 1866년 3월 11일 체포되어 3월 30일 갈매못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주교와 함께 순교했다. 다블뤼 주교와 같은 날 시복, 시성되었다.
위앵(Huin,1836-1886) 신부는 프랑스 태생으로, 1861년 사제 서품을 받고 1865년 5월 27일 조선에 입국, 내포지방에서 전교 중 역시 다블뤼 주교의 자수하라는 서한을 받고 1866년 3월 11일 붙잡혀,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와 함께 1866년 3월 30일 이곳 모래사장에서 순교했다. 같은 날 시복, 시성되었다.
황석두(黃錫斗, 1814-1866)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나, 과거를 보러 한양길에 나섰다가 우연히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간 벙어리 행세를 하여 가족들을 설득시켰다.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을 때 주교의 조선천주교회사와 천주관계 저술들을 돕고 있던 황석두는 주교를 따라가고자 스스로 주교의 제자라고 포졸들에게 말했다. 1866년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처형되었다. 역시 같은 날 시복,시성되었다.
장주기(張周基, 1803-1866)는 경기 수원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었지만 한문을 잘 알았다. 형수 김 바르바라의 권유로 입교했다. 거듭된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피신해 다니다가 제천의 배론에 정착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도맡아 도왔다.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잡혔을 때 그는 함께 잡히기를 청했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에게 잡혀 끝내는 자신의 소원대로 신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위 4인의 성인들과 같은 날 시복, 시성되었다. 이처럼 자진해서 죽음의 길을 선택한 다섯 성인의 유해는 현재 연풍성지에 있는 황석두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두산순교기념관 지하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승리의 성모성당 올라가는 길
승리의 성모 성당
성당 건물 곡선이 참 아름답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내부
승리의 성모성당 입구
성당 내부
내려오면서 본 성당 벽
공사 중이라 성당 올라가는 길의 14처는 비닐에 싸여 볼 수 없었다.
갈매못 순교 성지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마음이 숙여해지는 곳이다.
여유있게 둘러 보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된다는 것을 알기에 더 더욱 마음이 짠하고 한켠에는 마음이 무겁다. 죄 많은 인생이다보니 선뜻 발길이 옮겨지지 않아 늘 멀리서 바라보며 살기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