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서울 문묘와 성균관"

智美 아줌마 2010. 7. 31. 23:47

 

서울 문묘는 고려말, 조선시대의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태조 7년(1398)에 창건되었으나 정종 2년(1400)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의 병화로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성균관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선조 34∼35년(1601∼1602)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36∼37년(1603∼1604)에 동무·서무·신문·중문을, 39년(1606)에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중건 확충하였다.

인조 4년(1626)에는 정록청·존경각·양현고 등을 재건하였으며, 고종 6년(1869)의 한 차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삼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에 공자와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영역의 대성전, 동무, 서무, 삼문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고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있는 곳은 교육을 위한 성균관이다.

삼신문은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지어진 문으로서 대성전의 남쪽입구에 남향으로 지은 3간의 문이다. 돌아가신 성현들의 넋이 출입하는 세 개의 문이라고 하여 삼신문이라고 한다

삼신문 안쪽의 은행나무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직제자 15명의 신위와 주자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의 대가 6명의 신위, 그리고 퇴계와 같은 한국의 대표 성리학자 18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 합하면 39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이 분들께는 일 년에 크게 두 번(2월과 8월) ‘석전제’라는 제사를 드린다. 이 제사는 문묘제례라고도 하는데 공자님이 문(文)을 이룬 분이라 해서 문성왕이 불리기 때문에 그 제사를 문묘제례라 부르는 것이다.

이 제사는 조선조 때 아주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와서 제를 올렸다. 이 제사는 대단히 장엄해서 64인의 무용단과 두 그룹의 정악대가 동원되는데, 특이한 것은 이 공자에 대한 왕실의 공식적인 제사가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제례는 고려 때 중국에서 수입한 것을 세종이 복원한 것인데 중국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과 공산주의를 거치면서 그 의례들이 다 소멸된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중국의 TV가 와서 이 성균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례를 모두 동영상으로 담아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우리의 문묘의례는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한 원형인 셈이다.

대성전 편액

 

대성전 양쪽 앞에는 측백나무가 2그루 있는데 이 나무를 삼강오륜목이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사진에서 잘 보이는 않지만 오른쪽 나무는 가지가 세 개이고 왼쪽 나무는 다섯 개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유교에서 제일 중요한 가르침인 삼강과 오륜을 상징한다고 한다

동삼문과 동무, 동무는 태조의 한양 천도 이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중건되었다. 동·서무에는 본래 공문제자 69위와 중국의 한·당·송·원나라의 제현 및 우리나라의 18현 등 112위를 동·서로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하고, 그 밖의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위패를 태워서 땅에 묻음)하여 현재 동무·서무는 비어 있다.

밖에서 본 동삼문

서무

 

묘정비각은 태종 9년(1409)에 문묘를 복건(復建)한 뒤 변계량(卞季良)에게 문묘의 연혁을 기록하게 하고, 각석(刻石)하여 세웠다. 비각은 중종 6년(1511)에 서향 1간으로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러나 인조 4년(1626)에 변계량이 썼던 문장을 다시 각석하고, 이정구에게 명하여 비음을 기록하게 하고, 이를 이홍주가 쓰고 김상용이 전서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

 

 

대학당(수복청)은 문묘를 관리하던 남자 종들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4년(1601)에 중건되었다.

제기고는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으며, 춘추석전 및 분향일에 사용되는 제기를 보관하던 장소이다

나무 옆구리에 구멍이 참 묘하게 생겼다.

사당과 성균관 사이의 담장

담장 양 옆으로 북장문이 2개 나있다.

생명을  다 한 나무가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1519년 (중종14년) 대사성 및 동지관사를 지낸 윤탁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학생들에게 뿌리가 무성해야만 가지가 발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그 근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 심었으며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 수령은 500년이다. 대게 은행나무는 암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지만 이 나무는 수나무라고 한다.

 

 

 

동쪽에 있는 나무는 전쟁 때 가지가 7개로 갈라졌지만 본래 줄기 크기만큼 잘 자랐다.

 

옆으로 누운 가지들을 나무 기둥으로 받쳐 놓았다.

명륜당은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중앙에 강당, 좌우 양측에 동익헌과 서익헌 두 협실을 둔 강당이다.
이곳 명륜동 지명은 성균관 안에 있는 명륜당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현판 글씨는1606년 명나라 시신 학자 주지번의 글씨이다.

 

 

명륜당 뒷 모습

과거 지망생들은 우선 소과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들어와 숙식을 하면서 대과를 준비했는데 성균관에 들어와 대과를 준비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였으나 조선의 과거 중 정기 과거는 3년에 한 번만 치르는데 합격생이 3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서제와 동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하는 기숙사로 동·서재를 합하면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재의 첫번째방은 약방, 서재의 첫째방은 서일방으로 방의 순서에 따라 등급이 정해져 있는데 퇴계, 율곡 선생께서도 이곳에 계셨다고 한다.

 

서재 들어가는 문

동재

동, 서재의 창문

중간에  드나드는 문이 있다.

소화기와 북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고 한다.

서재

 

이 돌은 유생이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 스스로 이 돌에 올라가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고 한다.

동재 앞면

중간 중간에 나있던 문

 

왼쪽 건물이 학생들이 식사를 하던 진사식당이다.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이라 하는데, 아침·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내부는 문이 잠겨져 있어 틈 사이로 한 컷 찍었다.

존경각은 성종 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후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어 복원한 뒤로 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하였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서적 위주였으며, 불교·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장서의 분량은 존경각 건립 초기에는 수만 권에 달했으나, 잇단 전란과 재정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다.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으나,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강제로 옮겨지고, 나머지만이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육일각은 영조 19년(1743)에 명륜당 북쪽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창고

 

 정록정은 설립 초기에는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시정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기능은 폐지되고 관내의 서무만을 전담하는 기구로 축소되었다

 

 

 

향관청은 문묘 제사 때에 제관들이 재계하고 향축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성현의 건의로 성종 4년(1473)에 명륜당 북동쪽에 남향, 10간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후 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에 중건되었다

향문

탕평비는 1742년(영조18년) 3월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 영조의 명으로 성균관 반수교에 세워진 비석으로 "공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가 평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궐문, 문묘 앞에 세워 놓은 석비로 1413년(태종13년)에 처음 나무로 만든 표목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
비석 전면에는 "대소인원개하마" 즉, 대소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려라는 뜻으로 쓰여있고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1품이하는 궐문으로 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내려야 한다고 되어 있단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셀카 한 컷!!

※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성균관 대학교 교문 오른쪽에 위치
(도보 10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