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순례길 독립유공자 묘역
일성 이준열사 위훈비
이준열사 말씀비
자유 평화 수호의 상
이준열사묘역
이준 열사(1859~1907) 호는 일성·해사·청하·해옥 으로 한말의 항일애국지사.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개혁당, 대한보안회, 공진회,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했다. 보광,오성학교를 세웠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위종 등과 합류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참석 못하고 순국했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작은 공원 묘지에 있는 이준열사묘
신익희 선생묘
해공 신익희(1894~1956) 신익희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비서장 등을 지냈고,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회 부의장, 국민대학초대학장, 자유신문사장, 제헌국회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950년 재선되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발전시켜 대표최고의원이 되었고, 1956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가 뇌일혈로 숨졌다.
신하균선생묘
신하균(1918~1975년) 본관은 평산, 국회의장을 지닌 신익희선생의 장남이다. 한국의 정치인·서예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독립운동을 하였고, 광복 후 귀국해서는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익희선생묘 왼쪽에 자리하고 계신다
이시영선생묘
이시영(1869.12.3~1953.4.17) 본관 경주(慶州). 호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 성흡(聖翕). 1869년 12월 3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 만주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통치에 반대했다.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
이시영선생묘비
광복군 합동묘소
유림선생묘
유림(1894.5.23~1961.4.1) 호는 단주. 유림은 타협이 없었는데 외아들 원식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원식은 뒷날 5·16 쿠데타에 참여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낸 인물로 일제 때는 만주에서 일본군 고급 장교였다. 유림(柳林)은 일제 침략의 첨병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아들과 평생 부자의 인연을 끊고 “자식을 잘못 키웠다 ”며 부인도 물리친 채 평생을 홀몸으로 산다.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 무렵까지도 당의 잔여조직을 이끌던 67세의 유림은 혁신계의 대동단결을 호소, 장건상, 정화암, 김창숙, 김학규 등과 더불어 혁신동지총연맹 구성작업에 앞장선다. 그러나 혁신계의 주류가 사회대중당으로 옮겨 간 가운데 1960년 7·29 선거에서 이 연맹의 공천으로 안동을구에 입후보한 유림은 또 다시 낙선의 쓴잔을 마신다.
당시 서울 제기동에서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살던 유림은 1961년 4월 1일 정오께 집 마당에 나무를 심다 심장마비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감한다. 바로 그 시각에 가정부는 쌀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에는 망명생활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고 광복된 조국에선 외세의 지배와 이승만 독재에 투쟁했던 유림의 임종에는 아무도 함께 하지 못했다.
김창숙선생묘
심산 김창숙(1879-1962) 본관은 의성으로 선조 때 명신학자인 동강 김우옹(1540-1603)선생의 주손으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스승 한계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목을 밸 것을 상소하는 ‘오적매국성토상소사건’과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장서’를 작성하여 발송한 ‘파리장서사건(제 1차 유림단사건)’으로 가진 옥고를 당하였다. 1910년에는 향리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 시대에 통하는 선비를 길러야 한다는 애국계몽의 일념으로 청천서당에 성명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여든 넷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심산 '김창숙'.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다.
일본의 식민통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법을 무시했고, 항소도 변호사도 거부했다.죽을 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은 해방후에도 이어져 '민족통일운동'과 '반독재운동'을 거치면서 이승만정권을 비롯한 독재정권에 꼿꼿이 맞섰고 이로 인해 심한 고초를 겪었다.
두 아들마저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만년에 지독한 가난으로 병원비 조차 없이 서울 변두리 허름한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 62년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